티스토리 뷰

이번 포스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세기의 이혼 스캔들’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모던걸 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신여성으로 불리우는 화가 나혜석 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그녀는 일제강점기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으로 공주처럼 살 수 있었으나 탈공주를 선언하며 아쉽게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나혜석은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나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참고로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부잣집이라고 불리는 명문가 출신으로 나혜석은 당시 여성으로서 보기 드물었던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한 조선의 신여성 이었습니다.

 

 

그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으로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으며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당시 사회는 그녀의 견해를 외면했다고 합니다.

 

또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는데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을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그녀의 결혼생활은?

 

 

나혜석은 변호사 이자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김우영과 결혼을 하였는데 원래 나혜석은 결혼 할 생각이 없었으나 집안에서 학비지원을 끓으면서까지 끈질기게 결혼을 강요하는 바람에 결국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하던 김우영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 당시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는데,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혜석은 남편과 세계일주 여행 중 만난 최린과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김우영과 이혼을 하였고 막상 이혼 후  최린은 나혜석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죄라며 당시 돈 12,000원의 소송을 걸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법원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패소 판결을 받았고 대중들도 나혜석에게 냉정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이혼과 자신의 불륜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담은 '이혼고백장' 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때문에 전남편 김우영은 비웃음거리가 되어 변호사로서 사실상 일을 하지 못하고 다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을 하기 전부터 첩이 있었으나 이는 나혜석의 부정을 부각시키느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 시대를 앞선 선각자적인 여성으로 불리우는 나혜석, 아쉽게도 그녀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그녀는 여러 논란 끝에 결국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양로원에도 있었으나 매어 있기를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길 위에 서는 것을 좋아했던 나혜석은 1945년 12월 길거리에서 행려 병자로 사망하였고 가족들은 그녀를 무연고자로 처리하는 바람에 그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