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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출격 1954'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스포츠 한일전은 언제나 큰 관심을 모으는 경기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종목을 꼽는다면 단연 축구 한일전!!

 

 

한일전은 40번 넘게 치렀으나 역대 가장 큰 점수차로 우리가 이긴 한일전이 있습니다. 바로 최초의 한일전이자 우리가 일본을 누르고 첫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던 1954년 스위스월드컵 예선 한일전 입니다.

 

 

6.25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맞붙은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어떻게 일본을 꺾을 수 있었을까요?

 

“패하면 현해탄에 몸던지겠다”
 
1954년 3월7일 한국 축구대표팀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5대1로 격파했습니다. 

 

 

광복 후 첫 한일전이자 일본을 이긴 원조 ‘도쿄 대첩', 출격 1954

 

 

1954년, 전쟁의 폐허 속에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기, 선수단 구성도 어려워 이유형 감독은 생업에 뛰어든 20∼40대 선수들을 어렵게 불러모았습니다.

 

승리의 주역은 ‘경평 축구’의 주역들!!

경평축구에서 평양대표로 뛰었던 최정민과 경성대표 이광석을 중심으로 꾸려진 선수단은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비로 훈련하고 축구화와 유니폼을 구입했습니다.

 

 

평균 나이 35살의 서울과 평양 출신 선수들은 강한 한파 때문에 축구화에 고춧가루를 넣고 뛰었으며 감독과 선수들은 일본에게 패할 경우 모두 현해탄에 빠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죽기살기로 뛰었습니다.

 

 

재일동포들도 일본 원정 경기를 위해 모금을 했고 경기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하며 힘을 보탰습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맞붙게 돼 있었지만 “일본인이 우리 땅에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반대로 두 경기 모두 일본 도쿄에서 치러졌습니다.

 

 

1차 전에서 한국대표팀은 북한 출신인 최정민 선수의 맹활약에 힘입어 5대1로 대승, 2차전을 2대2로 비겨 아시아 대표로 스위스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였습니다.

 

일본의 36년 억압 속에서 일본 땅에서 태극기를 펼치기도 어려웠던 시기 일본 땅에서 최초로 대한민국 태극기가 게양됐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으며 재일동포들이 마음껏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 대한민국을 외쳤던 감동의 순간 이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평 축구’ 주역들을 어렵게 모와 청와대의 절대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에 건너가 경기에서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경기에 나섰던 사실상의 남북단일대표팀

 

 

이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하나의 힘을 보여준 희망이고 남북이 스포츠를 통해 화합할 수 있음을 세계에 알린 시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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